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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

고구려의 역사

 

서론

지난번의 글에서는 고구려의 신분제도, 정치체제 등 다양한 특징에 대해서 다루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 나라의 특징 만으로는 다각적인 시도로 고구려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구려 이전의 나라나 집단의 경우 언어가 부족하거나 언어를 글로 나타내기 힘든 상황이기에 유물로써 그 특징은 파악할 수 있었지만 시간 속에서의 역사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 그리고 그 주변 국가인 백제나 신라부터는 언어를 글로 표현하기 용이했고, 오랜 시간 동안 나라가 지속되어 왔기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등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중요한 역사 사건은 무엇이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본문

고구려 소수림왕의 정복의 토대 완성

고구려의 번성 시기는 5세기이다. 그렇기에 번성한 시기에 있던 왕은 중요하고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셋은 바로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이다. 먼저 소수림 왕에 대해서 파악해 보겠다.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맏아들로 제17대 왕이다. 불교와 도교 등의 종교를 받아들였으며, 태학을 설립하여 유교의 이념을 수용하였다. 이를 통해 국가를 번성하게 할 인재를 교육하였다. 또한 중앙집권화의 토대가 되는 율령을 반포하였다. 율령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용어로, 법과 제도를 의미한다. 종교와 율령이 중앙 집권화의 토대가 된 이유는 많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포용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율법은 고구려 내의 사람의 경우에도 안정되고 통일된 삶을 살게 해 줄 뿐 아니라, 정복된 땅에 흡수된 사람 또한 포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백제 침략과 북진 정책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의 손자로 17살에 나이로 391년에 왕위에 올랐다. 연호를 반포에 영락이라 명하고, 군주를 왕에서 태왕으로 높여 부르게 만들었다. 392년 7월에 18살이던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10월에는 백제의 북방 요새인 관미성을 20일에 걸친 포위로 함락시켰다. 396년 고구려는 큰 규모로 백제를 공격하여 이북의 58개의 성, 약 700 개의 촌락을 점령 하며,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거란을 공격하여 소수림왕 시기에 포로가 되었던 1만명 정도의 백성을 되찾았다. 395년에는 염수라는 지역으로 침략하여 거란족을 타격하여 복속시키고 많은 소나 말, 양등의 가축을 빼앗았다. 398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지대가 안정되었다.

 

399년에서 400년 사이에 백제와 왜는 신라를 협공 하였다. 이때 당시 광개토대왕은 399년에 평양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라는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도움을 구하였다. 광개 토대왕은 400년에 신라에 5만 군대를 파견하였고, 왜군을 물리쳤다. 왜군은 금관가야의 종발성까지 퇴진했으며, 고구려군은 왜군을 끝까지 물리쳤다. 이후 금관가야 세력이 약해져 금광가야 주도의 가야연맹이 붕괴하고, 대가야 중심의 가야연맹이 시작하였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과 평양천도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아들이다. 연가, 연수, 건흥 등의 연호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414년에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워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었다. 국내성의 귀족세력의 권력이 강하기에, 이를 약화시키려고 427년에 종묘사직을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종묘사직은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을 의미한다.

 

장수왕은 중국과의 외교로 관계가 안정화되었다. 이후 아래쪽으로 남진 정책을 추진 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하였으며, 이로 인해 454년을 기점으로 신라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468년에 신라의 실직주성을 공격하고, 그다음 연도에 백제의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의 살수 대첩

612년 중국의 수 양제는 113만 38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 공격에 들어섰다. 좌장군 우문술은 군사가 45만 명이고 우장군인 우중문의 군사도 45만 명이었으며, 수양제 자신의 군사고 26만 명이었다. 병참 지원을 포함하여 추정하였을 때 병사는 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출발 시간 또한 약 40일이 걸렸고, 행렬이 400KM가 되었다. 하지만 수양제의 군사는 고구려의 수성, 청야전, 혹독한 기후 등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우문술과 우중문의 군사 30만 명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얻었다. 이후 강이식과 고건무 등의 명장등의 활약으로 원정이 끝이 났다. 이후 명장이던 고건무는 공로를 인정받아 영류왕이 되었으며 을지문덕의 남은 후손은 한국에서 목천 돈 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