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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특징

고구려의 특징

 

서론

삼국시대에는 3개의 나라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협력하며 살아간다. 그 국가로 백제, 신라, 고구려가 등장한다. 우리는 모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3개의 나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를 뽑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구려를 택한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역사적인 사건보다 어떤 문화적, 정치적 특징을 갖고 있었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고구려의 정의

고구려의 초대 왕인 동명성왕이 국호를 고구려라고 지었다. 이후 장수왕이 국호를 고려라고 개칭하였지만, 편의를 위해서, 통일하여 고구려라고 현대에서는 칭한다. 고구려는 평안도, 랴오닝성, 지린성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고 영토가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반도의 중부 및 남부로 확장하기도 하였고 위쪽의 헤이룽장성과 연해주, 몽골 또한 지배하였다. 성씨 중에서도 고씨가 왕족인 것이 고구려의 특징이다.

 

고구려의 정치 

고구려는 본래 부족 연맹체제였다. 고구려의 중심 세력은 소노,절노,순노,관노,계루의 5 부족이었다. 왕은 5 부족 중에서 대표가 선출되는 방식으로 정해졌으며, 선출된 왕은 부족 연맹장이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선출된 왕은 어느 사이 세습 되어 정해지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소노부 나중의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삼국 이외에 다른 국가들이 멸망할 시기 즈음에 연맹 체제에서 벗어나 관료 체계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율령 정치가 시작하였으며,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더더욱 정비되어 갔다.

 

고구려는 초기에 국왕 밑에 상가,대로,패자,주부,우대,승,사자,조의 등을 두었다. 이러한 관리는 427년 평양천도 이후에 변경되었다. 관료의 등급이 12등급으로 발달하여 대대로,태대형,울절,태대사자,조의두대형,대사자,소형,제형,선인 등으로 나뉘었다. 

 

지방의 경우 중앙,동,서,남,북으로 하여 5부로 나뉘었다. 각각의 5부에는 욕살이라 칭하는 부왕급 군관과 처려근지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지방 내부의 성주를 통솔할 의무가 있었다. 

 

고구려의 경제

고구려의 산업은 농업 위주였으며 국가에서도 농업을 촉진하였다. 농사를 주로 하는 것은 피지배계급으로 일반 농민이었다.  고구려의 세금제도는 세(稅)와 조(組)가 대표적이다. 인두세에 포함되는 세는 포목 5 필에 곡식 5 섬을 내야 했다. 조는 민호를 3등급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는데, 가장 높은 등급인 상호는 1 섬, 중간 등급인 중호는 7말, 하호는 5말을 받쳐야 했다. 섬과 말은 곡식을 세는 단위이다. 섬은 180리터, 말은 약 20리터였다.

 

고구려의 신분제

고구려의 계급은 귀족과 호민, 하호와 노비로 크게 4가지로 구성된다. 5부 출신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형성하였고, 정치를 주도하였다. 또한 그들은 왕족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을 귀족이라 칭한다. 이들은 직위를 세습하였고 높은 관직을 맡았다. 넓은 토지를 소유하며 조의,선인,대사자 등의 관리를 거느렸다.

 

일반 백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바로 호민과 하호이다. 호민은 소족장 출신이면서 지배계층이고 하호는 피지배계층이다. 둘 중에서도 하호는 대부분이 농민이고, 토지를 경작하며 납세를 해야 하고 병역의 의무를 졌다. 때로는 토목공사에 사용되던 그들은 전근대기에 촌락을 구성하던 농민층이었다. 하호는 중국에서도 사용되는 언어로 중국에서 차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하호를 노비로 보는 견해도 있고 노비와 평민이 같이 있는 계층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들은 지배층에게 식량 등을 바치는 자고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고구려의 인구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70만 호 정도되는 가구수가 집계되었다. 그렇기에 인구를 약 300~4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형법

고구려에서의 형법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엄격하다. 반역을 탐하거나 반란을 꾀는 자는 화형을 처하고 화형에 처한 시체를 다시 목을 베었으며,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하거나 전쟁에서 패한 자는 사형하였고, 도둑질을 한자는 도둑질을 한 물건이나 돈의 12배를 물게 하였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다. 남의 가축을 해한 자는 노비로 삼기도 하였고, 빚을 갚지 못한 경우 자식을 노비로 만들기도 하였다. 중대한 범죄의 경우에 제가가 모여서 토의하는 제가 회의를 통해 처벌의 강도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 무기

고구려의 화살 무기로 대표적인 것은 국궁과 각궁이다. 그 외에도 석궁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성을 방어하는 데 사용한 무기로는 투석병이 있으며, 도끼창을 던지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보병은 창과 칼 두 가지 무기를 같이 사용하였다. 첫 번째는 짧은 양날 창으로 던지는 용도로 제작되었다. 두 번째는 단일 양날 검이었다. 갑옷은 미늘 갑옷을 이용하여 군인이 자유롭게 이동 가능 하였으며, 신발의 밑은 뾰족한 송곳이 박혀 있어 적을 밟을 때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