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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위만조선의 특징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특징

 

서론

우리나라의 최초 국가는 고조선으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의 문화나 특징 또한 근원이 되는 고조선의 영향 아래에 있습니다. 물론 너무 오래된 과거의 국가기에 이러한 영향에 대해서 실감하지 못하지만, 역사는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며 그 흔적은 항상 존재합니다. 이 글에서는 고조선의 문화와 사회 구조 등에 대해서 파악하고자 합니다.


고조선의 정의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입니다. 최초 어느 시기부터 세워진지 잘알려져 있진 않지만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8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을 본래 고조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의 원래 국호는 조선입니다. 고조선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조선과의 구별을 위해 지은 이름을 뿐입니다. 고조선은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에 있던 고대 국가로 파악됩니다. 문헌상으로는 실존했던 국가라고 많은 역사학자가 인지하지만, 관련된 유물이 매우 적은 편입니다. 그렇기에 정확한 고조선의 특징을 알기 힘들고 추상적입니다.


고조선의 사회 및 문화

고조선에서는 8조법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8조법을 통해서 고조선의 사회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3개만이 남아 있습니다. 8조법은 권력층의 사회질서 유지 목적을 실현하였습니다. 아래의 3가지 법 조항을 적어 보았습니다.

1.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2.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3.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그 죄를 갚는다.

첫 번째 법 조항과 세 번째 법 조항을 통해서 8조법의 응보주의적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문항을 통해서는 화폐의 개념과 사유재산, 노비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배층의 무덤 특징과 연결 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당시 지배층의 무덤에는 화려한 부장품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유재산과 계층의 분화와 연결됩니다. 물론 아직도 촌락이나 시골 지역에서는 공동체적이고 평등한 관계가 이어지기도 하였지만, 계층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계급은 귀족, 일반민, 노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귀족은 토지, 재화, 노비를 소유하였으며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그들은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비의 수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노비를 이용하는 노예 경영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노예 경영을 살펴보았을 때 그러한 지역은 화폐 경제의 발달 및 도시의 번창 등의 특징이 존재하지만, 고조선에서는 그러한 특징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민은 생산활동의 주축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농사를 짓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농업은 그 당시 생산력이 낮고, 철제기구가 부족하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가뭄이나 홍수의 존재로 농업 생산이 불안정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촌락 단위로 농사를 짓게 되었고, 상호 의존적이며 공동체적인 농사와 소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조선의 단군왕검과 단군 신화

단군왕검은 고조선을 세운 사람입니다. 단군은 대제사장을 의미하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단군왕검은 통치자이면서 종교적 지도자였다는 것으로, 제정일치의 군주입니다. 단군신화는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는 것처럼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다 먹지 못하고 도망가지만, 곰은 끝까지 마늘과 쑥을 먹으며 웅녀라는 여성이 됩니다. 웅녀는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고 그가 고조선을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설화는 단순히 재밌는 설화로써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사회와 연결 지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곰과 호랑이는 하나의 집단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곰을 숭배하는 집단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집단 중에 전자가 환웅 세력과 힘을 합쳐 고조선을 세웠다고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단군 신화는 왕권의 정통과 존엄성, 당위성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제작된 것이라고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을 세운것이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기 때문에 권력이 당위적이고 존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조선의 왕은 매년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단군신화는 모든 집단을 통합하고 결속시키는 장치로써 작용하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였을 것입니다.


위만조선의 시작

기원전 195년 한나라가 연나라 지역에 임명한 노관이 흉노라 망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연나라에 혼란이 닥쳤으며, 그곳 사람은 고조선 지역으로 같이 망명하였습니다. 위만은 이들 약 1000명을 고조선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상투를 틀고 고조선 복색을 한 채로 고조선에 도착하였으며, 준왕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의 관직을 내었습니다.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함과 동시에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위만은 준왕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94년에 중국 군대의 침입을 구실을 세워 고조선을 장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수도 왕검성에 입성하여 결국 준왕을 밀어냈고, 이후부터 위만 조선이 시작하였습니다.


위만조선의 정치

위만 조선에는 다양한 관명이 존재하였습니다. 박사, 대부, 상, 대신, 장군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관직을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 세력을 지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열된 집단은 한나라와 전쟁 중 전선을 이탈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위만 조선에서는 여러 명의 상을 두었습니다. 그들은 고조선인으로 왕실의 통제력 아래에 있었지만,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왕은 이러한 집단에서 가장 권력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국가의 의사 결정은 상들이 참여한 회의체에서 결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조선의 정치에서 자연 왕권은 강하지 않았고, 관료 조직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