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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동예의 특징

옥저,동예의 특징

 

서론

청동기 시대에는 우리나라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이 존재하였다. 그 이후인 철기시대에는 고조선 외에 다른 국가들이 등장하였다. 그중 삼국시대에 없고 멸망했던 나라로는 옥저, 동예 등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삼국시대 전의 국가 옥저, 동예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옥저의 지리와 환경

옥저는 함경남도 영흥 주변과 두만강 유역에 존재하던 종족 및 집단 등을 가리키는 나라이다. 토지가 비옥하단 특징을 갖고 있어 오곡을 생산하였다. 또한 바다 주변에서 물고기나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하여 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옥저의 문화

옥저는 현재 우리나라와는 다른 문화제도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으로 민며느리제와 세골장이 있다. 민며느리제는 결혼과 관련된 문화이다. 민며느리제는 신부와 신랑이 어린 시기에 약혼을 한 이후, 신부가 신랑의 집에서 거주하다가 어른이 된 이후에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제도이다. 세골장은 장례풍습과 관련된 문화이다. 가족이 사망한 경우 시체를 풀 또는 흙으로 매장하고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목곽에 들여놓는 문화이다. 이때 옥저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입구에 매달아 놓았는데, 이는 죽은 자의 양식을 위해 마련된 풍습이었다.

 

옥저와 고구려의 관계

옥저는 고구려에서 큰 피해를 당한 국가이다. 옥저와 고구려는 본래 부여족의 한갈래였다. 하지만 옥저는 위에서 말한 해산물과 같은 바다에서 나는 것들을 고구려에서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면서도 동천왕 때 침략을 받는 등의 피해를 당하였다. 역사적으로 기원후 30년 한의 제후국으로 지정되었다가, 56년에 고구려에 지배되었다. 244년 위나라의 군대에 큰 피해를 본 이후, 285년에 고구려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예의 사회 구조

동예는 공열 토기가 주가 되는 무문토기 문화이다. 옥저 고구려와 비슷한 지역에서 성장하여 언어 및 풍습이 비슷하다. 하지만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로 인한 피해가 커서 후기에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가족 단위를 칭하는 호수는 2만 정도이며, 군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직명의 경우 후, 읍장, 삼로 등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씨족사회로, 책화라는 전통이 존재하였다. 책화는 다른 마을을 침략하는 때에 재물이나 가축으로 이를 보상하는 전통이다. 또한 고조선과 비슷하기 응보주의적 유습이 드러난다. 동예의 법속으로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형법이 사용되었으며, 이에 따라 도적의 수가 적다고 알려져 있다.


동예의 시작

동예는 기원전 82년에 등장하여 약 6세기에 멸망하였다. 원산부터 강릉 사이의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은 부족 국가이다. 옥저와 같은 처지로 한군현에 속해 있다가 6세기 무렵에 멸망하였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으며, 직조 기술이 뛰어났다. 서쪽에 있는 마한, 백제와 군사적으로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동예의 문화

동예는 대표적으로 3개의 특산물이 존재하였다. 바로 과하마, 반어피, 명주와 삼베이다. 과하마는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3척의 말을 의미한다. 반어피는 바다표범의 가죽을 의미한다. 명주와 삼베는 의식주 중에 의와 관련된 것으로 명주는 비단을 의미한다. 이는 방직 기술이 발전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문화와 관련하여 동예 또한 다양한 풍습이 존재하였다. 족외혼이라고 하는 동성 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가 존재하였다. 또한 질병이 있는 자나 사망자가 존재하면 집을 버리는 금기 등이 존재하기도 하였다. 새벽에 별자리를 보고 이를 통해 그해의 풍흉을 점치는 제도가 존재하였다. 또한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진행하였다.


동예의 멸망

동예는 멸망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학자에 의해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

 

신라의 정복

첫 번째 가설은 신라의 전성기 당시에, 신라가 함경도 일대 동해안까지 진출할 때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2개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신라 진흥왕의 북진 진출 시 동예가 하서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서주는 명주라고도 불리는데,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 소경의 한 주이다. 두 번째는 위쪽 지방의 함경남도에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옥저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강원도 강릉에 이르는 지역을 이르기 때문에 이를 정복한 신라가 이를 멸망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스스로 멸망

두 번째 가설은 내부적인 문제로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동예의 정치 형태는 중앙 집권화가 되지 않은 국가 형태이다. 다시 말해 왕권이 한곳으로 모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내부적 분열, 반란이 멸망의 시초라고 보는 가설이다.

 

고구려의 병합

세 번째 가설은 고구려가 동예를 낙랑군으로 병합하여 없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고구려는 과거에 위나라와 피폐해진 상황이 존재한다. 이때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권 안에 존재하다가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통합시키자 동예도 고구려에서 병합당했다고 보는 가설이다. 하지만 이는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동예가 고구려의 영토로서 병합된 것이 아니며, 속국의 형태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멸망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인정받는 가설이 아니다.

이러한 세 가지 외에도 유목민의 이주에 의한 멸망이라는 가설 등등 다양한 가설이 존재한다.